[시사뉴스 김철우 기자] 사람에게 인격이, 나라에 국격이 있다면 정치에도 격(格)이 있을 것이다. 인격은 ‘사람으로서 품격’으로 국어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짐승과 인간을 구별하는 잣대로 여겨왔다. ‘인격이 없다’는 말은 ‘양심 없다’ 말과 같이 심각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국격은 정부와 시민사회가 갖추고 있는 정직과 신의, 배려와 관용, 민주적 의사결정 등의 사회적 자산이 국격을 이루는 가치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 세계 10위권의 5030클럽 가입(인구 5,000만 명이면서 국민소득 3만 달러 넘은 나라) 국가, K-콘텐츠 문화 강국 등으로 세계인에 인식돼 있다. 그런데 최근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가 다시 드리우고 있다.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 Institute)에서 발표한 ‘민주주의 리포트 2024(Democracy Report 2024)’에 따르면 한국은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뒷걸음질 친 나라로 분류됐다. 이 보고서는 179개국의 민주화 수준을 ‘자유민주주의지수(LDI)’로 수치화한 결과를 발표한다, 한국은 2019년 18위, 2020-21년 17위, 2022년 28위였던 것이 47위로 떨어져 이제는 라틴아메리카의 웬만한 나라보다도 더 낮거나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국격의 중요한 가치를 이루는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 즉 정치는 어떨까? 국민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리고 보살피는 정치,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는 정치는 그저 흘러 다니는 식상한 말이 된지 오래다. 절차적 민주주의 체제로 들어선 1987년 이후 37년은 진영 간 대결 정치로 얼룩진 시간이었다. 정치가 나라 국격을 떨어뜨리는 대표 선수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걸 장삼이사의 술자리 안주로만 치부하기에는 정치 불신이 임계점에 이르렀다. 4.10 총선 과정에서 뇌리에 남는 건 여야가 쏟아낸 막말과 극단적 혐오 부추기뿐이다.
비록 공직에 나서기 전 사적으로 했다지만 부적절한 발언의 인사를 공천한 것도 문제지만, 이를 이용해 상대 당에 극단적인 낙인찍기와 험한 막말 공격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 ‘나베’, ‘범죄자 집단’, ‘도둑’, ‘일베’, ‘XX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누가 더 세고 나쁜 말을 하는지 경쟁하는 선거였다. 일개 지역구 후보가 내뱉은 말이 아니라 선거를 지휘하는 각 정당의 지도자들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심각하다.
정치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정치인의 인격과 무관치 않다. 공자가 지은 중국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좌씨전에 언신지문(言身之文)이라는 말이 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심정을 나타내는 문채로, 말은 마음의 문장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언행일치를 강조하면서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라는 의미다. 특히, 정치는 말과 설득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막말과 상대에 대한 혐오가 일상화한 정치가 민생을 살피고 국민 통합을 이끌기는 어렵다. 막말은 한 번 터지면 언제 어디서 타오를지 모른다. 소시민들은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을 배설해 억하심정이나 강박관념을 해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인이 마음속에 담아둔 감정의 응어리를 거친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상대에게 표출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들기도 한다. 정치인의 말은 천금과 같다고 한다. 그만큼 책임이 무거운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중들 앞에서는 반드시 사전에 준비해온 말만 발언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정치인들도 대중연설을 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적어 온 것을 읽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조그만 어휘 하나가 뜻하지 않는 의미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이어령 교수는 국격을 높이려면 “우선은 우리 안의 ’천격(賤格)‘을 걷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격의 대표적인 것이 천박하고 저속한 말이다. 정치가 비속어로 가득하고 상스러운 말들이 난무해서는 민주주의나 국격은 설자리가 없다.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게 정치의 일상이겠지만 막말과 혐오를 부추기는 말부터 걷어내야 정치가 제일을 할 수 있다. 천박하고 과격한 언어가 정치를 망신창이로 만든다. 또 극단적 진영 대결 정치를 협치가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작업도 시급하다. 현재의 승자독식 정치체제는 상대를 악마화해 상대에 대한 극단적 공격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헌법을 고쳐서라도 협치가 가능한 정치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