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신화의 의미를 거듭 궁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힘’에 있다. 커피 한 잔에서 챗GPT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이야기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정점에 ‘신화’가 있다.
BTS와 해리포터에서 리그오브레전드까지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 ‘호모 픽투스(Homo Fictus)’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다른 동물에 비해 보잘것없던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이유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믿는 능력’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류는 실재(實在)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부족, 민족, 국가 같은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이야기는 인류가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소통 방법이자, 다른 시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다. 신화(myth)라는 말은 ‘이야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뮈토스(mythos)에서 유래했다.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압축해서, 후손들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게 이야기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신화’다.
오늘날은 이야기 폭증 시대다. 유튜브와 TV, 영화, OTT, 웹툰, 게임 등이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SNS를 통해서 ‘나의 고유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꾸준하게 상징을 토대로 한 문화가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산업은 이야기를 활용해서 엄청난 수익을 낸다. 그리스신화 속 ‘전령의 신’이자 ‘상업의 신’ 헤르메스의 이름이기도 한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HERMES).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인 버킨백은 통상 몇 년을 기다려야 살 수 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1만 1,400달러에 달하는 버킨백은 제조원가가 1,000달러에 불과하다. 구매가와 제조원가 간의 10배 넘는 간극을 메우는 팔 할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가방’이라는 서사다.
변형되고 창조되며 살아있는 이야기
신화는 유물화된 관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다. 스타벅스는 그리스신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초록색 동그라미 안에서 미소 짓고 있는 세이렌은 과거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바다를 지나는 선원들을 유혹하고 홀렸으나, 오늘날에는 커피의 맛과 향으로 세상을 항해하는 우리를 유혹하고 홀린다.
케이팝 그룹 BTS는 ‘축제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를 무대 위로 소환해 음악과 춤으로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작은 것들을 위한 시’에서 이카로스 신화를 통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빠르게 성장한 자신들의 처지를 은유한다. 이들은 신화의 상징을 빌려 노랫말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간다. 이들 21세기 이카로스들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기보다는 작은 존재의 소소한 행복을 지키며 그들과 눈 맞추며 나는 것을 비행의 목표로 삼는다.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현재 우리가 즐기는 작품의 서사 밑으로 그리스신화가 흐르고 있다. 이처럼 신화가 끊임없이 현재적인 작품에 소환되는 이유는, 삶의 방식들은 달라져도 삶의 속내는 크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천둥 번개가 치면 제우스 신이 노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사는 사람이나 스마트폰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는 시대를 사는 사람이나 삶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그대로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욕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죽음’이라는 삶의 필연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