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 후 대학 선생이 되어 보겠다고 진학한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까지 나는 주류로 살았다. ‘뺑뺑이’로 입학한 고교 시절에도 입학 성적이 좋았기에 당당했다. 대학원 때 학비 보조를 받기 위해 학과 사무실 조교를 한 일이 있다. 나처럼 본과 출신이 아닌 타과, 심지어 타대 출신은 근로장학금과 연계된 사무조교 자리조차 얻기 어려웠다. 나는 교수 연구실 조교 ‘낙점’이야 연구실의 ‘주인’인 교수가 하지만 사무조교만큼은 차별 없이 희망자에게 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타과 출신 여학생, 타대 출신 여학생과 셋이 교대근무를 했다. 석사학위 논문을 썼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사용한 커뮤니케이션학의 토착화하는 용어에 대해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도교수가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논문심사 주심을 맡은 그는 논문 발표회장에서 학문의 세계엔 일반화밖에 없다고 코멘트했다. 나는 논문을 인쇄할 때 토착화를 한국적 적응이라고 고쳐야 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고 취직하겠다는 나를 말리는 선후배들에게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에게 계급장 떼고 얘기해 보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은사와는 안 되더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나이로 서른에 중앙일
서울고 3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교문 지도를 마친 우리 학교 선배 교사가 우리 반이 수업 대기 중이던 본관을 향해 걸어오는데 누군가 창밖을 내다보다 냅다 욕을 했다. 그 선생님이 그날 두발 단속에 걸린 학생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 고속도로를 냈기 때문이었다. 고3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실로 뛰어올라온 선생님은 욕을 한 학생을 잡아내려 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가는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종례를 마칠 때까지 제 발로 찾아오지 않으면 “자동으로 3운동장 집합”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우리 학교엔 운동장이 셋 있었다. 제일 작은 3운동장은 복원된 경희궁 뒷산에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일제가 강점기에 철거한 경희궁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장이었던 나는 종례를 마친 후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 다녀갔어. 해산~” 다녀갔을 리 만무했다. 제자이자 까마득한 고교 후배에게서 공개적으로 쌍욕을 들은 선생님의 분이 그 새 풀린 듯 했다. 걸핏하면 군대식 단체기합을 받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학교는 ‘까라면 까는’ 상명하복의 병영 문화가 지배했다. 군사정부 하 고등학교와 대학엔 교련 과목이 있었고 교련시간이면 교련복을 입
1967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왕십리의 무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의 직장이 있던 뚝섬에서 가까운 왕십리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영등포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았다. 오래 전 내가 태어난 이 동네를 찾은 적이 있다. 내가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오류국민학교, 내가 자란 오류동교회를 기준점으로 그 시절 하굣길을 되짚어 봤다. 내가 살던 집은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서울 사람들은 실향민이다. 고향을 찾아도 이미 옛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전학한 학교의 우리 반은 100명이 넘었다. 2부제 수업을 했는 데도 그랬다. 말 그대로 콩나물 교실이었다. 지난 여름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다 우연히 국민학교 7년 선배임을 알게 된 박용기 박사는 자기가 다닐 땐 3부제 수업을 했다고 들려줬다. 그 시절 나는 체구가 작았고 유약한 성품의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 서고 싶어 했다. 우리 반엔 손 아무개라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못했고 주목도 못 받는 요즘 말로 ‘찌질이’였다. 나이가 많은 남자 담임은 그 애를 발 아무개라고 불렀다. 막 전학 온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러는 담임이 유치해 보였다. 한번은 담임이 슬리퍼를 벗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