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가 전 지구적 현상이 되고 있는 요즘 중국, 필리핀, 베트남, 몽골 등 아시아 국가의 많은 여성들이 결혼이민 위주로 한국으로 오고 있다. 우리 여성들 또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며 ‘100년간의 낯선 여행’을 경험했다. 12월17일까지 여성사전시관에서 열린 ‘여성과 이주’를 주제로 한 특별기획전은 여성 이주 역사를 살펴보게 한다.
100년 전의 결혼이민
이주의 역사는 재해와 흉년으로 시작되기 마련이다. 1860년대와 1870년대 사이 조선에 재해와 흉년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많은 이재민들이 간도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조선인의 인구이동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중국 동북부 조선인 사회는 더욱 확장됐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상하이, 러시아, 만주, 미국, 멕시코 등지에 여성 항일운동 단체들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100년 전 이미 미국으로의 결혼이민도 시작됐다. 결혼을 희망하는 미국 내 한인 이주자들은 자신의 사진을 조선에 보냈으며, 이 사진을 보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한인 여성들은 사진을 동봉해 미국의 남성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성사가 되면 신랑측은 10~15년 동안 현지에서 모아놓은 돈을 털어 신부가 될 사람이 미국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경비를 부담했으며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도 부담했다.
최초의 사진신부는 하와이 한인 이주자 이래수와 결혼하기 위해 1910년 11월 28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최사라로 기록돼 있다. 1910년 11월에서 1924년 10월까지 미국에 이주한 사진신부는 총 1100여명이었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15~17세였으며 대부분이 서울 경기지방과 남부지방의 빈가출신 소녀들이었다. 미국의 한인 이주자 남성들과 결혼을 하기 위해 이주해 온 한인 여성들은 대부분 남편들과 나이 차이가 많았다. 평균 나이 차이는 약 15세였으며, 이는 수많은 가정문제를 낳고 젊은 한인 여성들이 고생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진신부들은 돈을 벌어 딴 세상에서 살기 위해, 가부장제의 희생물이 되기 싫어서, 조국을 되찾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등 이유는 갖가지였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가난과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가고픈 동경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군인아내
신여성들이 등장하면서 유학이 여성들을 여행하게 한 새로운 이유가 됐다. 4월에 발족된 ‘재동경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등 여성 유학생 모임은 유학생 간의 친목 도모뿐만 아니라 국내 여성들에게 앞선 지식을 전달하는데 힘썼다.
1940년대는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이주의 비운을 겪는 여성들이 양산됐다. 위안소에는 처음에 일본의 유곽에서 일하고 있던 일본인 여성이 이송돼 왔으나, 곧 인원이 부족해져 식민지하의 조선인이 다수 잡혀 이송됐다. 일본, 중국, 필리핀, 대만 등 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간 여성들은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거주했던 일부 여성들만 국내로 돌아왔을 뿐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1950~89년에는 십만 명에 가까운 한국인 군인아내(military bride)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50~53년 이전부터 남한을 지배했으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군의 남한 지배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여성들은 미군 병사들을 만나서 결혼했다. 한국인 군인아내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로부터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나라가 분단되던 시대에 태어나서 자랐다. 1970, 80년대를 통틀어 이들이 한국 이민 최초의 핵심적인 연결 고리였으며, 그런 만큼 이들이 한국 이민사회의 구성에 도구적인 역할을 했다.
한미 관계의 제국주의적인 성격과 남편과 아내 사이의 연관 관계, 미국화하라는 압력과 아시아 여성들과 그들 가족 관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이미지 사이의 연관 관계는 가장 사적인 관계에서마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 여성들은 언어의 장벽, 인종의 장벽, 계급의 장벽 앞에서 그냥 좌절하고 피해자 의식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간다. 물론 고통과 좌절과 가난도 있고 버림받은 상처와 슬픔도 있지만 자신의 운명에 맞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경제발전에 이바지
1966년 10월 15일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한국 간호요원 1126명이 도착했다. 이에 앞서 1960년부터 가톨릭 교회를 통해 일부 한국 간호요원이 서독에 가기는 했으나, 대규모 공식 ‘파독’은 이때부터이다. 1973년에는 독일 전역 452개 병원에 6124명의 한국 간호요원이 파견됐으며, 이 가운데 베를린에 2000여 명이 자리를 잡았다. 1960년부터 정부 차원의 간호사 공식 파독이 끝나는 1976년까지 17년간 총 1만226명이 파견됐다.
간호사는 주로 서울 중앙의료원 간호학교 및 연대 의대 간호과 등 국내 유수의 간호학교 출신들이 20대의 어린 나이에 외화 획득과 가계의 생활 보조를 위해 유럽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현지 병원의 형편에 따라 5~10명 정도씩 나누어 배치됐다. 언어의 장벽, 현지 간호사의 질투, 향수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족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외국에서의 취업 생활을 견뎌 나갔다. 생활비를 절약하고 아껴 쓰면 매달 100달러를 집으로 송금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힘든 상황을 참아낼 수 있었다.
서독 간호사의 경제적 기여는 당시 외화수입이 거의 없었던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독 간호사 이후 해외 취업은 국내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가 1970년대 초에는 미국, 일본으로 간호보조원이 파견됐다.
여성사전시관의 이번 특별기획전은 이 같은 여성 이주의 역사를 생생한 시각적 자료와 당시의 정서를 담은 예술 작품들로 감성적 전달을 시도한다. 전시 관계자는 “지난 100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들의 경험과 기억을 더듬으며,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여성들의 이주의 의미를 생각해볼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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