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순 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세상이 점점 험악해져 간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묻지마 살인이 늘어나고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도 카드빚이나 한탕주의에 의한 것이 많아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인격장애 넘쳐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경기 한파 때문일까. IMF 이후 경제사범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경기침체는 범죄의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는 명제는 범죄학에서 범죄의 요인을 파악할 때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결국 개인적 환경적 요인이 범죄의 보다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법의학자 라까사뉴(A. Lacassagne)는 사회환경과 범죄의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사회는 그 각각에 상응하는 범죄를 갖게 마련이다’ ‘사회환경은 범죄를 배양하는 커다란 용기이며, 범죄는 그 속에서 자라는 미생물에 해당한다’ 등의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강력 범죄는 IMF 이후 증가해, 최근엔 사이코패스의 범죄 같은 잔인한 범죄가 점차 늘고 있다. 이에 대해 사회 전체가 병들었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질만능주의와 윤리의식부재가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 의대 정신과는 20대의 45%가 인격장애로 의심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도덕적 교육 지침 무너져
정신과 전문의 이창인 씨는 “최근 범죄자들의 범죄유형은 살인을 꼭 하지 않아도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경우에도 살인을 하는 등 도덕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며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경향이 짙다고 말했다. 이 씨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환자는 대체로 부모에게 방치되거나 폭력과 학대, 애정결핍 속에서 자라난 경우가 많다. 혹은 부모의 일관적이지 않는 행동과 처벌, 과보호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 신뢰할만한 모델과 행동의 분명한 지침을 찾지 못해 사회규범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공격적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결국 한국 사회는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하면서 도덕적 교육 지침 자체가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통적 윤리관은 급속히 해체됐고 물질주의와 자아상실 등의 비인간화 경향은 해결방안을 찾기 전에 빠르게 번져나갔다.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전통적 덕목은 젊은 세대, 도시인, 고소득층, 고학력 집단일수록 약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인다고 나타났다. 그리고 젊은 층으로 갈수록 물질 우위 적이며, 돈을 버는 방법은 적당주의 현실안주 성향이 강해 건전한 근로 의식이 퇴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전남대 심리학과 한규석 교수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돈을 중시하는 풍조로 꾸준히 변모해왔고, 가정에서 맡아왔던 인성교육이 현대엔 심각하게 축소됐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단순히 도덕 과목의 수업시간을 늘인다고 사회 전반의 도덕성이 강화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을 얻기에는 제도적 교육은 한계가 있다. 부모나 친구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회화 과정이 더 중요한 교육이다”며 “하지만 오늘날 가정은 모든 교육을 학교의 몫으로 돌리는 분위기라 인성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자극적 보도도 위험
오늘날 범죄 증가는 사회전반의 폭력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최인섭 실장은 “폭력범죄가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며 TV나 영화, 게임에서 여과 없이 보여주는 폭력적 장면에 우려를 표했다.
한 교수 또한 “TV 드라마나 요즘 히트하는 영화에는 섬뜩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매체가 범죄를 가르쳐주는 결과가 된다. 검열이 느슨해지면서 일어나는 악영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폭을 영웅적으로 표현하거나 잔혹한 묘사가 영상문화 전반에 범람하는 것은 사실. 이것이 판단력을 강화하는 교육이 부재하고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이 흔들리는 상황에 쏟아지면서 범죄를 자극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팀은 707가구 청소년을 대상으로 17년간 ‘폭력장면이 시청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지난 2월 미국에서는 부모를 산탄총으로 쏘아 살해한 범죄에 ‘매트릭스’ 모방론이 제기됐으며, 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고등학생이 “영화 ‘친구’를 40번이나 보면서 용기를 키웠다”고 진술해 논란이 됐다.
논픽션 영상물 외에도 범죄를 센세이션 하게 다루는 언론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최 실장은 “유괴 납치 사건은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성격의 사건이 아닌데 최근엔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며 “사건 보도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은 모방범죄의 인상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실업수당이 범죄율 줄이기도
빈부격차에 의한 계층적 위화감을 범죄 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순수한 의미의 배고픔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문제라는 것이다. 상류층의 과시적 소비 형태도 같은 맥락에서 범죄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노력은 범죄를 줄이는 방법이 된다. 전문가들은 적극적인 소득재분배 프로그램,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등은 범죄 억제 정책에서 선행돼야 할 부분으로 손꼽는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처벌 시스템 아래서 더 많은 액수의 실업수당은 범죄율을 줄이는 효과가 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처벌시스템이 너무 관대하다면 실업수당 증액은 범죄발생에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공권력의 약화를 범죄 증가 요인으로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다. 최근 검찰과 경찰도 범죄의 대담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앞에서 놓치거나 손을 못 쓰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연세대 사회심리학 이훈구 교수는 “조폭과 범죄에 대한 사법 당국의 응징 강도를 더 높여야 한다. 미국에서는 유괴사건 발생시 연방수사국(FBI)이 자동적으로 개입한다. 유괴범은 반드시 체포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재발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범죄 요인이 단순 명쾌하지 않은 만큼, 범죄율을 줄이는 방법에 있어서도 종합적인 대안을 요구한다. 한 교수는 “단순한 대책들로 범죄율을 줄일 수는 없다고 본다. 사회체제 전반적 여건이 범죄 발생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인성 교육, 부의 재분배 등 우리 문화의 총체적인 재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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