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된 여성은 70명에 이른다. (사)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가 남편이나 남자친구인 사건은 전체 82건이었고, 이 중 살해된 여성은 70명으로 나타났다. 46명은 남편에 의해, 24명은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됐다. 실제로 언론이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남편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는 남자’가 더 무섭다
아내대신 가족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녀, 친정부모 등은 16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7월에는 아내가 집을 나가자 의붓딸 두 명을 목 졸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9월에는 장모와 처형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자녀와 친정 식구를 살해한 이 사건은 “도망치면 너희 가족을 죽이겠다”는 폭력 남편의 위협이 단순히 위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상담건수 1766건을 분석한 결과 또한 가해자의 97.6%가 남성으로 나타났다. 피해자와의 관계는 남편겴渙瓦裏?애인겙解탑聆括?82.8%를 차지했다. 데이트폭력은 결혼 이후 가정폭력이 되고, 가정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이혼하더라도 폭력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 배우자에 의한 폭력이 되어 유지되고 있었다.
데이트관계에서 살해되는 여성과 아내폭력으로 살해되는 여성은 친밀한 관계에 있던 남성에 의한 살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가해자 통계도 여성폭력이 모르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는 통념이 사실과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성폭력 상담 605건 중에서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일 경우는 22명(5.4%)에 불과했다. 친밀한 관계에 있거나 과거에 친밀한 관계였던 남성이 가해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이처럼 여성폭력 가해의 대부분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지만, 국가는 폭력의 가해자가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처벌에 적극으로 나서지 않는다.
지난 9월 국가의 안이한 대처로 또 한 명의 아내가 살해될 뻔 한 아찔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의 김씨(여)는 ‘죽여 버리겠다’며 흉기로 자신을 찌른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으나 남편은 어찌된 일인지 하루 만에 풀려났다. 풀려난 남편은 신고한 아내에게 앙심을 품고 온몸에 기름을 뿌려 불을 붙이려다 미수에 그쳤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도 있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도 있지만 가정폭력은 집안일이라는 통념에 가려서 제대로 처벌받거나 보호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피해자들은 자신이 참고 사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가해자들은 국가의 비호아래 폭력을 지속한다.
가정폭력상담소 면접상담 통계를 보면, 경찰에 한 번 이상 신고한 적이 있는 48명 중 22명은 “집안일이니 잘 해결하라며 돌아가라”는 답변을 경찰로부터 들었던 것으로 나타났다(45.8%). ‘가정폭력방지법의 내용을 설명해주며 조치를 취하기’보다는(22.9%) 오히려 ‘법으로 해결하고 싶으면 고소하라’는 태도로 피해자에게 해결할 방법 없음을 설명하기 바빴다(39.6%).
살아남은 여자들의 비극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들은 남편의 폭력이 곧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으로 하루를 살아 내거나,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폭력 남편을 사망에 이르게 한다.
가정폭력상담소 면접상담 내담자를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면, 남편의 폭력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여성은 6.5%에 불과했다. 남편의 폭력을 멈추게 하기 위한 노력들을 복수응답으로 체크한 결과, 아내들은 대화를 시도하거나(57.9%) 주변사람을 통해 남편을 설득시키기도 하며(31.8%), 이혼을 요구하거나 가출하는 등 남편과의 분리를 시도하기도 한다(66.4%). 상담을 받거나(20.6%) 경찰에 신고하기(15.9%)도 했다.
아내폭력 피해자들이 무기력하고 불쌍하기만 하다는 통념과는 달리 실제로 피해자들은 폭력을 끊어내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일상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폭력이 멈추지 않고,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며, 가족과 자신의 삶과 생명에 대한 위협이 지속될 때, 아내가 시도하는 마지막 방법은 남편 살해가 되고 있다.
작년 아내폭력에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여성은 언론에 드러난 수만 10건 이었다. 70명의 죽은 아내들과 더불어 “누구하나 죽어야 끝이 난다”는 가정폭력의 비극이 여전히 강건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폭력여성들 살인자로
(사)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지난해 6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제초제로 살해한 박민경(가명) 씨는 1심에서 10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두순은 극악한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음주를 이유로 감형되어 12년을 선고받는데 그쳤다”며, “그러나 27년간 아내폭력에 시달려왔지만, 당일 폭력이 없었고 살인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가중형을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작년에 죽어간 70명의 아내들이 그러했듯이 남편의 죽이겠다는 위협은 이들에게 위협이 아니라 현실이며, 그 현실은 지금 당장 남편의 폭력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며, “가해는 간헐적으로 일어나지만, 위협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폭력의 현실에 눈감고 가중형을 선고한 재판부 역시 70명의 사상자를 낸 가정폭력 현실을 만든 장본인 중 하나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이 입증되는데도 불구하고, 폭력 남편이 구타 중에 아내를 살해할 경우 살해의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로 ‘살인’이 아니라 ‘폭행치사’ 사건으로 처리되기도 하며, 심지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한다.
오히려 피해자를 가중 처벌하는 현재의 법체계 속에서 아내폭력 근절은 요원하며, 살아남은 아내들은 위험에 방치돼 살거나 살인자가 되어 10년을 감옥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새해 정부정책에서 아내폭력 예방을 위한 예산은 오히려 감소했다. 아내폭력에 대한 경찰의 초기개입 정책도 없고, 위험에 방치되는 아내들의 보호시스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부재하다.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된 여성 통계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적도 없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그녀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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