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사회·문화적으로 가부장제에 가려져 희생의 이미지로 굳어진 ‘어머니’에 관한 허구와 진실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통섭적 사유가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 가족의 초상화로 시작해서 정신분석, 문학 및 예술 비평을 결합해 모성이라는 주제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왜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 됐는가
모성에 대한 사유를 담은 스무 편의 에세이다. 예술 에세이로, 문학비평으로, 정신분석 에세이로도 읽힐 수 있는 이 책에서 허스트베트의 글쓰기는 사적인 기억에서 출발해 서서히 공적 담론의 영토로 진입하며 비판적 사유로 진화한다.
허스트베트는 1887년 미네소타에서 노르웨이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할머니에게 바치는 매우 개인적인 에세이 ‘틸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할머니 ‘틸리’를 매우 활기차고 열정적인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가 가계의 역사를 정리할 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누락하고 오로지 부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과 경험뿐만 아니라 가족의 독특한 역사를 바탕으로 경계의 빈틈을 탐구하는 글은 곳곳에서 날 선 애정을 드러내며 독자를 휘청이게 만든다.
어머니와 매우 친밀했던 허스트베트는 고단하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활기와 유연함을 잃지 않고 집안에 평화를 유지해온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을 반추하고 그들과의 추억을 되짚어본다. 노르웨이인 이민자로서 척박한 땅을 일궈내고 어려운 시기에도 성실한 가장으로 식솔을 책임져온 할아버지와, 그런 가계에서 부계 중심이라는 지향점을 지녔던 아버지의 삶도 되돌아본다. 그렇게 어머니들, 아버지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며 우리 삶의 출발점인 어머니라는 존재, 모성이라는 역할의 어떤 부분이 사회·문화적 제 현상에서 무시되고 간과되고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고찰한다.
성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들
어머니라는 존재의 핵심 측면은 사회·문화적 담론에서 제외되고 어머니는 종종 사회 병폐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왜 그런 것인가. 모성은 언제나 페미니즘의 중심에 있었지만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페미니즘의 담론조차 모성의 원형에 대해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또 어째서인가.
이 책에 수록된 여러 편의 에세이 중 <그는 펜을 떨어뜨렸다>, <읽기라는 수수께끼>, <이것과 저것 둘 다>는 치밀한 비평가인 허스트베트의 탁월함이 매우 돋보이는 글이다. 허스트베트는 공부하고 많이 읽고 잘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고, 미래라는 이름의 장소에서 생활비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업의 동료로, 학문의 제자로, 강렬한 책의 온전한 창작자로 받아 들여주지 않은 남자들, 허스트베트 자신이 이룬 모든 지적 결과물에 유명인인 남편의 도움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주저 없이 말하는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뇌 문신’으로 지니고 산다.
그래서도, 엄격한 위계질서의 사회 속에서 글로써 ‘설득’의 전형을 보여준 수사학의 대가 제인 오스틴을, 지금도 수많은 해석을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마음속 ‘경계’를 허무는 소설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를, 선제적으로 남성성을 걸치고 다니며 남성 비평가들의 편견에 맞섰던 화가 루이즈 부르주아를 여성을 혐오하는 세계에서 지적·창조적·전략적 능력으로 살아남은 비범한 모델로 우뚝 세운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에세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판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재배치됨으로써 또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