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1945 년 5월 8일, 이른바 ‘제로시간’부터 1955년 까지 10년 동안 독일이 거쳐야 했던 재건의 노력과 사회적 분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 이는 책.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독일을, 그 역사의 장면을 되살 린다.
야만의 시대에서 시민의 시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똘똘 뭉쳐 있었던 독일 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완벽하게 분열되었다. 폭격에 사망하거나 피난, 망명, 강제 이 주를 당한 사람들에 1000만 명의 강제 징용 자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총 4000만 명에 달 했다. 자신이 살던 자리에서 추방당하고 끌 려가고, 풀려나며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시민의 정체성을 찾 을 수 있었을까?
가장 중대한 변화는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먹을 것을 조달하는 일에서, 약탈에서, 교환 에서, 구매에서 일어났다. 가족은 해체되고, 삶의 질서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인간 관계 는 상실되어 갔지만, 사람들은 새롭게 다시 모여 어울렸다. 전후 독일인의 의식을 볼 때 홀로코스트가 미친 영향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했다. 자신들의 ‘수상쩍은 행복’을 위해 서 홀로코스트를 회피했고, 자신들을 희생 자로 그렸다. 그러면서도 전후 시대는 지금 까지 여겨지던 것보다 더 논쟁적이었고, 삶 은 더 개방적이었으며, 지식인은 더 비판적 이었다. 의견의 스펙트럼은 넓었고 예술은 더 혁신적이었다. 이런 의식적 억압과 왜곡 속에서 반파시스트적이고 신뢰를 일깨우는 오늘의 독일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책은 전쟁 직후 10년의 기간 동안 독일 이 거쳐야 했던 재건 사업과 그 속에서 분열 된 독일인의 멘털리티를 다각도로 살핌으로 써, 잊고 있던 1945년과 1955년 사이의 독일 을 새롭게 조명한다. 공식문서나 출간된 책 뿐 아니라 일기, 수기, 문학작품, 신문, 잡지, 영상자료, 심지어 유행가 가사 등 방대한 자 료와 세심한 해석을 통해 독일이 어떻게 그 시기를 넘어 오늘의 독일을 만들었는지 새 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우리가 아는 자기반성은 없었다
패망 직후 지옥을 경험한 독일인은 마치 홀 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 들을 ‘희생자’로 여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그저 사람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 은 국가사회주의에, 사람을 순종적인 도구로 길들이는 ‘마약’과 같은 나치즘에, 히틀러라 는 ‘악’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 다. 당시 언론과 책, 논문에는 독일인이 겪은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이 넘쳐난 다.
저자는 패망 직후 수십 년간 수백만 명의 학살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논쟁은 존재하 지 않았다고 말한다. 과거 청산은 1963년부 터 1968년까지 아우슈비츠 재판이 진행되면 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또한 철저한 자 기반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68세대의 분노 에서 촉발된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 였다.
이처럼 다수의 독일인이 개인적 책임을 거 부했음에도 어떻게 오늘날의 독일이 가능했 을까? 여기서 이전의 과대망상만큼이나 핵 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몽에서 화들짝 깨 어난 듯한 급격한 ‘현실 자각’이었다. 게다가 연합국에 딸려 들어온 느긋한 생활 방식의 매력, 암시장을 통한 쓰디쓴 사회화 과정, 실 향민에 대한 사회적 통합 노력, 추상미술을 둘러싼 떠들썩한 논쟁, 새로운 디자인에 대 한 즐거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것 이 심리 상태의 변화를 촉진했고, 그 토대 위 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담론은 서서 히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독 일’과 ‘독일인’이라 부르는 그들은 바로 이렇 게 탄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