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를 이용한 설치작업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전광영(80). 그가 오랜만에 대작을 들고 나타났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집합:공명과 그 사이(Aggregations: Resonance, In between)’를 6년만에 풀어냈다.
이번 전시에서 전광영은 초기 추상회화 ‘빛’시리즈를 비롯해 ‘집합(Aggregation)’ 대형 설치작품, 그리고 힐링 시리즈 등 설치 4점과 평면 16점으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 ‘집합’ 연작을 통해 ‘집합’의 변천을 보여준다.
특히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올해의 작가’전, 2022년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 ‘재창조된 시간들(Times Reimagined)’에 출품된 작품들도 포함돼 작가의 예술적 성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전광영은 2003년 스위스 아트바젤 언리미니트(Unlimited) 섹션 초청을 비롯, 2002년과 2018년에 각각 모스크바현대미술관(MMOMA)과 뉴욕 브루클린미술관(Brooklyn Museum)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해외 전시에 주력해왔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를 소규모로 가져온 느낌으로 ‘리틀 ‘베니스’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석사하위를 취득했다. 20대를 미국에서 보냈지만, 한국적인 정서, 그 이상의 것을 탐구해왔다.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에 심취했으나, 한국 고유의 정신과 문화에 자신의 경쟁력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1982년에 귀국해서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해 엄청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보자기 문화와 한약방 약봉지가 떠오르더군요. "
전광영의 대표작 ‘집합’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작가가 1995년부터 발전시킨 ‘집합’ 작품은 처음에는 한국 고서(古書)의 한지로 싸고, 이를 꼬아 만든 종이 끈으로 묶어 나무 패널 위에 촘촘히 배열하고 조합해 반부조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시절 본 한약방에서 본 풍경과 보자기로 물건을 싸는 한국 고유의 문화적 관습을 작품에 투영,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작가의 손에서 탄생하는 ‘집합’ 시리즈의 표면은 하나의 통합된 서사를 이룬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담아내며 복잡하고 긴장감 있는 표현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광영의 작업은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문화적 경계를 넘어 전 세계 관객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품은 한국적 전통과 현대미술의 융합을 넘어 세계적 차원의 공명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소말리아 같은 취급을 받던 시절, 미국에서 유학하며 상당히 위축되었었죠. 나름 제 스스로는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현지 미술관에서는 ‘남의 것을 내가 흥얼거리고 떠들어봐야 내 예술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국내 귀국 후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물건을 보자기로 감싸는 우리와 문화 함께 떠오른 큰아버지의 한약방 천장의 약재 봉투는 전광영 작품의 삼각형 구성요소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한지로 하나하나 감싸는 그만의 작업 방식을 찾는데 주요한 요소가 됐다.
‘집합’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색채 사용에서 나타나는 변화다. 전광영은 ‘집합’ 연작을 갓 시작한 1995년부터 한지를 갖가지 색으로 물들이거나, 부적이나 신문지와 같은 재료를 사용해 화려한 색감이 강조된 화면을 구성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의 단초는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1980년대 작업 ‘빛’ 시리즈에서 볼 수 있다. 어린시절 고향 홍천에서 자연의 색을 보며 받은 영감을 ‘빛’ 시리즈에 옮겼다. 이때 주로 캔버스에 마스킹 테이프나 길죽한 띠모양의 작은 종이들을 흩뿌리고, 그위에 날염안료나 화공약품을 혼합한 유성물감을 떨어뜨린 후 종이를 떼어내는 고정을 반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로써 여러색의 안료 혹은 종이의 흔적들이 중첩되고 평면임에도 공간감이 느껴지는 효과가 생기게 됐다.
전광영이 한지를 사용한 후에는 회색조의 화면이 주를 이뤄왔지만, 근작은 초창기부터 보여온 색채에 대한 애정과 평면에 공간감을 부여하고자 지속한 매체 탐구의 결과를 보여준다.

이에 더해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4점의 대형 설치작품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2001-전광영’과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인 ‘재창조된 시간들(Times Reimaged)’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다.
1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Aggregation001-MY057’은 작가의 첫 입체 작품이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높이 3m, 지름 1.1m의 원기둥 열두개로 구성되었고,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다섯 개의 원기둥으로 재구성되어 전시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6개의 원기둥으로 등장했다.

수만년의 시간을 품은 자연과 인간이 대면한 상황이 이럴까. 3전시장에서는 바닥에서 솟아오른 우주의 괴생명체 같은 설치 작업 ‘Aggregation19-MA023’과 나이아가라폭포의 영상 작업 ‘Eternity of Existence’와 함께 설치되고 있다. 가로 11m, 세로 4m의 벽에 펼쳐지는 폭포 영상은 시각적으로는 당장에라도 관객을 삼킬 것처럼 경이롭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소리를 빼고 무음(無音) 처리해 두려움과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수만년의 시간을 품은 자연과 인간의 대면한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두운 안쪽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불안한 심장 소리가 들린다. 주기도, 간격도, 크기도 다른 소리에 귀기울이며 눈을 들면 시커멓게 탄 심장 모양의 대형 작업이 보인다.
‘Aggregation24-FE011’은 마치 매일매일 죽었다 살아났다 해야 할 만큼 힘들게 버텨야 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표현하는 것 같다. 또다른 Aggregation 작품에서는 공허하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집합’은 인간사와 세계사의 굴곡을 투영하는 창이자, 조화와 충돌을 반복하는 인류의 모습을 시각화한다.

“서양은 박스 문화지만, 한국은 보자기 문화, 정(情)의 문화이다”라는 작가는 “한자와 한글이 빼곡이 쓰여진 삼각형 조각, 지식 전파의 수단이었던 옛 문헌의 한 귀퉁이들은 나의 손에서 각기 다른 생명을 지닌 정보의 최소 의미로 재탄생하게 된다”고 밝혔다.
최근 전광영은 치유 시리즈를 전개하고 있다. 기존 화면에서 표현하던 충돌의 상흔을 희망을 상징하는 밝은 요소와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치유와 위로의 울림을 선사하고자 한다.
전시는 내년 2월 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