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상미 기자]'고(古)음악계 한류스타' 소프라노 임선혜(39)가 새로운 뮤지컬 디바로 우뚝 섰다. 한국 초연 중인 라이선스 뮤지컬 '팬텀'에서 '크리스틴 다에'를 맡아 존재감을 과시했다.
가스통 르루의 원작(1910)이 바탕이다. 가면 뒤에 흉측한 기형의 얼굴을 숨긴 채 '오페라의 유령'이라 불리며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비극적 운명의 '팬텀',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로 팬텀의 마음을 사로잡는 크리스틴의 사랑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임선혜는 크리스틴 역에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크리스틴은 시골에서 파리로 올라왔다 엉겹결에 오페라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없던 후원자와 선생도 갑작스레 생긴다. 자그마한 동양 여자애이던 임선혜도 순식간에 유럽 무대에 데뷔를 했다. '팬텀' 속 크리스틴처럼 파리 오페라극장 무대에 주역으로 올라 노래부르기도 했다. 장면마다 임선혜가 떠올랐다. 더구나 뮤지컬배우로 데뷔하는 이 무대 자체도 크리스틴스럽지 않은가.
마이크 사용이 익숙지 않은 탓에 고음에서 발음이 뭉개지는 등 대사를 알아듣는데 다소 불편함은 있다. 하지만 벨기에 출신의 거장 지휘자 르네 야콥스가 임선혜와 함께 일하면서 높게 평가한 부분 중 하나가 연기력. 임선혜는 표현력과 금방 익힌 뮤지컬스런 연기로 이를 상쇄한다.
30일 밤 흥인동 충무아트홀 대극장 '팬텀' 공연은 임선혜와 '팬텀'을 맡은 뮤지컬스타 류정한이 실제 무대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는 자리. 서울대 성악과 선후배(류정한 90학번·임선혜 94학번) 사이인 두 사람의 화학작용이 돋보였다. 팬텀의 마음을 한번에 빼앗은 '임선혜 크리스틴'의 창법이 의표를 찌르는 창이라면, 크리스틴을 감싸고 싶은 '류정한 팬텀'의 창법은 무엇이든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방패였다.
류정한은 재발견이라 할 만했다. 1막이 임선혜의 무대라면 2막은 류정한의 무대인데, 정점에 달한 그의 감정 연기는 팬텀의 아픔을 투명하게 노출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 '오페라의 유령'과 무엇이 다른가
EMK뮤지컬컴퍼니(대표 엄홍현)가 제작한 '팬텀'은 르루의 원작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세계 4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다르게 해석했다. 설앤컴퍼니(대표 설도윤) 제작으로 한국 뮤지컬 흥행 역사를 다시 쓴 '오페라의 유령'(1986년 영국 런던 초연·2001년 한국 초연)과 비견될 수밖에 없다.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과는 넘버와 이야기 전개 등이 완전히 다르다. 극작가 아서 코핏·작곡가 모리 예스톤이 협업한 작품으로 1991년 미국에서 초연했다.
작은 체구로 무대 곳곳을 뛰어다니며 가벼운 목소리로 노래해 '종달새'로 통하는 임선혜의 크리스틴은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보다 당차다.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은 청순형이다. '오페라의 유령' 2001년 한국판 초연의 크리스틴이 김소현이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임선혜와 김소현은 서울대 성악과 94학번 동기로 라이벌이기도 했다.
특히 '팬텀'이 팬텀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 집중하는 점이 가장 큰 차별화다. 크리스틴만큼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팬텀(에릭)의 어머니인 발레리나 '벨라도바'와 그녀를 사랑한 오페라극장의 극장장 '제라드'의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팬텀이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류정한의 팬텀은 그래서 입체적이다. 류정한은 '오페라의 유령' 초연 당시 팬텀의 연적인 귀족청년 '라울'을 맡았다. 이번에 정반대의 캐릭터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3층 구조의 대형 무대는 화려하다. 전환 속도도 꽤 빠르다. 팬텀이 종종 3층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무대 전체를 관망하려면 1층이 아닌 2층 중앙이 명당이 된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 원작 속 무대의 상징인 샹들리에가 웅장하지 못해 아쉽다. 이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장면에서도, 대각선 방향으로 긴박하게 떨어지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형'과 비교해 긴장감이 떨어졌다. 팬텀의 줄타는 액션도 큰 감흥은 주지 못했다.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해 가장 큰 아쉬움은 넘버다. '더 팬텀 오브 더 오페라(The Phantom of The Opera)' '올 아이 애스크 오브 유(All I ask of you)' 등 웨버의 음악은 첫 음만 들어도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팬텀'에는 이 같은 '킬링 넘버'가 없다. '파리의 멜로디' '넌 나의 음악' '내 비극적인 이야기'가 귀에 감길 듯 하나 파괴력이 없다. 비스트로 등의 장면에서 임선혜의 기교, 류정한의 드라마틱한 곡 해석에 의지해야 한다.
형편없는 노래 실력에도 오페라 극장의 극장장인 남편 '숄레'를 업고 디바 자리를 꿰차는 '마담 카를로타' 역의 신영숙, 안정된 연기력이 바탕인 제라드 역의 이정열은 극에 무게감을 더한다. 연출을 맡은 로버트 요핸슨 EMK뮤지컬컴퍼니 예술감독은 자신의 장기인 유럽 뮤지컬의 웅장함과 속도감을 이번에도 밀어붙인다.
팬텀의 또 다른 특징은 장르 융합. 특히 발레가 2막 초반에 삽입된다. 극 중에서 옛날 이야기인 벨라도바와 제라드의 사랑이야기를 남녀 무용수의 파드되(2인무)로 풀어낸다. 이 때문에 동화적인 우아함이 덧대졌다.
마지막에 팬텀의 태생적 아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의 아픔에 이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크리스틴의 마음을 느끼게 되면 감동도 슬며시 일어난다. 팬텀은 끝까지 완전하게 가면을 벗지 않지만 신비로움은 걷어내고, 좀더 깊숙한 곳을 꺼내 보인다.
7월26일까지. 또 다른 팬텀 박효신·카이, 또 다른 크리스틴 임혜영·김순영, 또 다른 발레리나 벨라도바 김주원·황혜민, 또 다른 젊은 카리에르 윤전일. 러닝타임 170분(인터미션 20분). 인간적인 팬텀에 어느덧 감동도 슬며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