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기자회견을 열 때만하더라도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은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지금 이 시기에 잘 이뤄지기 어렵고 시도하고 있지도 않다”고 했지만 이후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풀리면서 내심 이 전 총리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지 않으며 더 해명하기도 힘들고 답답하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이 전 총리는 북한 방문 성과 중 노 대통령에게 알릴 만한 것이 있다고 노골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태.
여기다 생전 열차방북을 하고 싶다고 밝혀온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나서, “남북이 원한다면 북한에 가고 싶다”고 적극적인 입장을 펴고 있다. 이와 맞물려 정부도 북한과 경의선, 동해선 열차시험운행 시기와 준비작업 등에 대한 논의를 북한과 벌이고 있다.
이해찬의 귀국 보따리에는 무엇이?

특히 이 전 총리가 이날 인천공항에서 열린 귀국 기자간담회에서 방북 성과를 설명하면서 “청와대에 전달할 사항이 몇 가지 있고 주미 대사 및 통일부에도 전달할 것이 있다”고 말한 부분은 정상회담 ‘특사설’과 맞물려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전 총리는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관련, “내가 북한의 6자회담 초기 이행 계획이 순조롭게 이뤄질 경우 남북정상회담을 4월에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정상회담 제의 사실을 밝혔다.
이 전 총리는 “그에 대해 북한에서는 별 얘기가 없었다”고 선을 그었지만, 동행했던 이화영 의원은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북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음을 분명히 했다.
이와 관련, 이 의원은 13일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진행되고 있는 워킹그룹 진행결과를 살펴보면서 남북정상회담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북측은 적극적이고 공감한다는 분위기였다”고 재차 강조했다. ‘특사설’이 제기되고 있는 이 전 총리의 입장을 고려, 이 의원이 서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전쟁 시기 행방불명자와 전쟁 이후 행불자, 납북자 문제에 대해 북측의 전향적 입장을 끌어낸 것도 성과다. 이 전 총리는 “이 문제를 4월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다룰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제까지 흘러나온 정상회담 추진설을 들여다보면 현 정부 들어 정상회담은 이번까지 세번 추진됐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2월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참여정부 초기 정상회담 직전까지 갈뻔했으나 무산됐고, 지난해 5월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한다”는 노 대통령의 몽골 발언을 계기로 정상회담을 추진하려 했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무위에 그쳤다. 청와대는 8일 이 전 총리 이행의 방북은 당 차권의 결정이며, 대북특사가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일행이었던 이화영 의원이 북한 고위층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주장하고 언론들이 6.15 정상회담설, 8.15 정상회담설을 만들어내면서 정상회담은 기정사실화 되는 분위기.
여기다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범 여권에서는 2.13합의가 이뤄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상회담 연내 개최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군불을 떼고 있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북핵 실험 이후 정상회담에 대한 ‘의욕’을 상당히 잃었다는 것이 현재 중론이지만 5월~6월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심경변화는 언제든 가능하다.
개헌에 올인하던 노 대통령이 과제를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에게 넘겨버리고, 현재 판새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이와 맥이 닿아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부담을 안더라도 이제까지 포용정책을 유지해왔던 마당에 임기말 정상회담 성사는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노 대통령에게도 국정난맥 돌파에 창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윤승용 청와대 대변인은 14일 “이 전 총리의 방북 문제와 관련해 정리된 입장과 기조에는 변함이 없고, 또한 대통령 특사도 아니었던 데다 친서도 없지만 현직 대통령 특보이기도 하고 전직 총리이기도 해서 비중을 감안, 이 전 총리가 방문한 결과에 대해 일부 대통령에게 말할 것이 있다고 했기에 얘기를 들어볼 예정”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이에 따라 정상회담 개최 시기와 관련해선 6.15공동선언 7주년이나 8.15 광복절에 맞춰 회담을 개최할 것이라는 설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나라당 정형근 최고위원은 “6,7월에 한반도에서 남·북·미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열린우리당 최성 의원은 “8·15를 전후해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렇다할 지지율 만회의 계기가 없었던 대다 소속 의원들의 대규모 탈당으로 사실상 추진력을 잃은 열린우리당으로서도 정상회담 개최는 반길만한 일이다. 한나라당이 이제까지 대북 포용세력 및 북한측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것에 대해 공세를 펼칠 수 있는 호기를 잡는 셈이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DJ행보

김 전 대통령은 기존의 힘들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틀어, 13일 자신의 방북 문제와 관련, “남북정상회담이 가장 좋지만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나의 방북을 바란다면 북한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희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국제기자연맹(IFJ) 특별총회 강연을 통해 “계기가 되면 북한을 방문해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얘기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6자회담의 성공,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6자회담의 합의로 남북간 긴밀한 대화가 진행되게 됐다고 전제한 뒤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격려하기 위해선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금년이야말로 북한 핵을 다루는 6자회담이 성공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협력의 새 봄이 올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며 “북미 양측이 이번에야말로 핵문제 협상에서 성공할 이유를 갖고 있고, 성공하지 못했을 때 엄청난 데미지를 입게 된다. 현실적으로 성공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남북주민 양측이 의식면에서 평화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으며 이번에 6자회담이 잘돼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수교가 이뤄지면 한반도에는 일거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이게 될 것”이라며 “남북관계는 봇물이 터지듯이 전면적인 교류와 협력의 시대로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전 대통령의 이날 강연은 지난해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6주년 기념행사에서 밴 플리트상 수상 연설을 한 이후 처음으로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올해 북·미, 남북 관계는 과거에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발전이 예상되는 만큼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는 이어 오는 27일 ‘로마 협정 50주년 EU(유럽연합) 기념행사’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며 동아시아 지역 통합 및 한반도 평화 발전과 관련한 유럽의 역할 등을 강연한다.
26일에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재학생 50여 명을 초청, 한반도 문제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다음달에는 국내 대학 강연도 계획 중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해찬 전 총리가 노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 전 대통령의 의중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번 방북은 일단 ‘DJ의 방북’을 성사시키는 ‘DJ특사’가 아니었나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DJ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내고 현 정부에서도 총리를 지낸 이 전 총리는 노 대통령과 DJ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사로 손꼽힌다. 실제 이 전 총리는 방북을 하루 앞두고 지 난 6일 서울동교동 자택으로 DJ를 예방해 1시간 동안 단독으로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는 지난해 무산된 DJ의 방북을 올해 다시 추진하는 방안이 논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 이달초 끝난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올해 상반기안에 경의선?동해선 열차를 시험운행하기로 합의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남북관계가 순조로울 경우 열차시험 운행과 더불어 취소됐던 DJ의 방북이 다시 성사되고 8?15때쯤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전망이 가능하다. 즉, 큰 흐름에서 보면 DJ 방북과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논의되겠지만, 일단 이번 방북에서는 DJ의 방북과 관련한 일정 등을 집중 논의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전 총리는 지난달 ‘2·13 합의’가 나온 다음날 비공개로 개성공단을 방문하는가 하면, 지난달 27일에는 DJ의 최측근인 권노갑 전 의원과 골프회동을 하기도 했다. ‘햇볕정책’을 매개로 DJ와 노 대통령을 연결하고 남북정상회담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이 전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잇따른 강연 행보는 이 전 총리의 방북을 계기로 ‘선 DJ 방북-후 남북 정상회담’ 추진설이 퍼지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특히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무산된 DJ의 방북이 다시 성사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발등에 불 떨어진 한나라당
이런 가운데 정작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은 “이 전 총리의 방북에 어떤 이면거래가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참여정부가 뒷거래를 통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지만, 13일 오후 태도를 급선회, 대북정책의 기조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2.13 합의’ 이후 북미, 남북관계가 급격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이 흐름에 뒤쳐질 수 없다는 판단으로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강경?안보적 입장에서 유화적으로 수정하겠다는 입장. 여기에는 향후 대선국면에 대한 이해득실 계산도 녹아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를 놓고 당 내부에서는 보수의원들이 이에 강력 반발하는 등 갑론을박이 치열한 실정이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대책회의에서 “지난 1953년 정전협정으로 남북 군사분계선이 설치됐고 이를 휴전선이라 부르는데 휴전선이 불완전하긴 했지만 지난 53년간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다”면서 “휴전선이 평화선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남북한 및 미국, 중국 등 4개국과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휴전선이 평화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한나라당은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당 소속 의원들에게 안내장을 보내 “어제(12일) 의원총회에서 급변하는 남북관계 상황에 당이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원들의 지적이 있었다”면서 “당에서도 대북통일·지원정책 및 관계정립 방안 등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의원 및 의원모임 차원의 방북계획에 대한 당 차원의 지원을 약속하면서 15일까지 ‘북한방문 현황 및 향후계획’에 관한 자료를 당에 제출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와 관련, 김충환 공보부대표는 브리핑에서 “한나라당은 대북정책에 있어 원칙을 지키되 방향을 근본적으로 조정하는 노력을 해 나가려 한다”면서 “앞으로 업무협의 또는 교류협력 차원에서 당 소속 의원들이 평양, 개성, 금강산을 방문케 하는 등 다양한 대북활동을 허용하고 적극 장려하는 쪽으로 당의 방침을 조정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내달부터 당 소속 의원들이 대북접촉 및 교류협력 사업에 적극 나설 것”이라면서 “당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화해협력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당내 보수 성향 의원들은 당 지도부의 이같은 기조를 심히 우려하고 있는 분위기다. 대표적으로 김용갑 의원은 ‘북풍에 한나라당이 떨고 있나’라는 제목의 개인 성명을 내고 강력 반박하고 나섰다.
김 의원은 “북한은 핵실험 한방으로 그야말로 꽃놀이패를 즐기고 있고, 한나라당은 북풍에 흔들리고 벌써부터 내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면서 “기회주의적이고 눈치나 보는 보수성향의 의원들이 앞장서 ‘한나라당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한발짝 더 앞장서야 한다’며 급진적인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지도부가 장밋빛 평화분위기에 편승해 당 소속 의원들의 대량 방북계획까지 세우는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친북좌파가 의도하는 대로 우리 내부에서부터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떤 북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북핵폐기 원칙을 지키며 한반도 정세변화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